동문 원로에게 듣는다-전윤철(11회)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념관 이사장

 7차례 재상 지낸 ‘행정의 달인’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처절했지만 치열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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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철(11회) 동문은 서울 법대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6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정부 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할 당시 공직에 들어가 43년간의 긴 세월을 공인으로 살았다. ‘정도’와 ‘원칙’을 중시해 온 그는 여러 차례 국무총리 후보 물망에도 올랐다. 이 정부에서도 당초 총리로 거론됐으나, 낙점되지 못한 것을 서울고 동문들이 안타까워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전 동문을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한다. 그는 4개의 정부에서 일곱 차례 정무직을 지냈다. ’94년 수산청장으로 승진하여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부총리를 거쳐 감사원장직을 연임해 정부 수립 이후, 최장수 장관직을 수행했다. 그래서 ‘직업이 장관’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여러 분야에서 오랜 기간 종합행정의 책임자로 일해 온 그는 우리나라 행정의 각 분야에 걸쳐 해결 할 과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직업이 장관이 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는 ‘처절했지만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이성과 야성이 교차되는 시기, 아름다운 꿈과 야망이 공존하는 시기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 당시 신문로 서울고 교정은 꿈과 낭만, 야망을 키울 수 있는 아름다운 환경이었지만, 나의 고교시절은 이러한 꿈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학업 아닌 현실 생활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처절하게 현실 생활을 매일매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슬픈 게 아니라 학교 공부를 준비하는 시간이 없어 안타까웠다.”
삶에 대한 그의 처절한 투지는 어쩌면 가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목포 변두리에서 6남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4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집안은 더 어려워졌다. 모친은 6남매를 키우기 위해 목포역 앞에서 함바집을 했다. 서울고 입학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울 생활 자체는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고등학고 때는 월세 내고 먹고사는 게 문제였다. 수업료도 직접 벌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우선 잠잘 곳부터 마련해야 했다. 전 동문은 지금 서울로얄호텔이 있는 명동 언덕배기에 자기 손으로 무허가 판잣집을 지었다. 그리고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매일 밤 군밤장수를 했다.
무엇보다 그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명문 서울고 학생이라는 자긍심이었다. “그다지 뛰어날 것도 없는 내가 대과 없이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울고 출신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깨끗한 공무원이 되고자 스스로 경계했고,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책임을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전 핏대’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서울고 학풍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경제기획원 국장회의 석상에서 ‘유신사무관 제도’ 폐지를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리고 공무원들에 대한 ‘24시간 감시체제’를 만들라는 기획실장 지시에 책상을 치면서 못하겠다고 거부했다. 그랬더니 전 핏대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원규 초대 교장선생님께서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라고 하셨다”면서 “원칙과 정도를 지키도록 하고 모범생을 키우겠다는 학풍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풀이했다.    
전 동문은 요즘도 광화문 신문로 앞을 지나칠 때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경희궁터를 보면 멍하니 쳐다보다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울고 출신이라는 것이 주는 정열적 자부심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자’는 전통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전 동문이 앞에 서게 됐을 때 남몰래 후배들을 이끌어준 것을 알만한 사람은 안다.
서울고 후배들을 이끌어주면서 아쉬운 점이 없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후배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인류가 경험한 3대 혁명은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통신혁명이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정보통신혁명이란 대변혁은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그는 규정했다.
전 동문은 “이러한 국경 없는 경쟁(Borderless Competition)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인생을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기회가 왔다가 가는데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내가 장관 할 때 밤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면서 “세계화 시대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은퇴를 앞둔 후배나 이미 은퇴한 후배들에 대해서는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건강해야 경쟁도 할 수 있고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동문은 뒤늦게 골프를 시작했다. 지난 2002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할 때 처음 골프를 배웠다.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할 때 대통령에게 말했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챙겨야 하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 골프를 치겠다고 했다. 그래서 대통령 허락을 얻어 주말마다 골프를 쳤다”고 회고했다.   
최근 남북 교류 움직임과 북미 대화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표명했다. 그는 “잘 성사되면 남북통일이 안되더라도 한국 경제의 잠재 성장률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내가 경제부총리 할 때 개성공단을 만들어 분양했다. 그런 공단 여러 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남북 경제협력 강화뿐 아니라 동북아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행·글_권영석(34회, 연합뉴스 경제에디터 / 부국장)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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