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토크(12회) 손경수vs연대성 선배와 스승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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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경수 VS 연대성 선배와 스승 사이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모교는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어떤 동문은 망설이지 않고 이때를 서울고의 위기라고도 말한다. 내부적 요인이 아닌 다분히 다른 이유들에 의해서 학교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유서 깊은 경희궁에서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서초동으로의 교사 이전, 한 학기에 네 분의 교장이 바뀌었던 혼돈 속에서 학교는 타의에 의해 끊어질 것만 같던 전통과 교풍의 동아줄을 이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가지들 앞에 서서 두 팔을 한껏 벌리고 혼돈의 비바람과 온몸으로 맞선 동문 교사들이 있었다. 두 교사는 고교 동기이면서 국사와 영어를 가르치는 평 교사였다. 나는 재학 시절 그 두 선생님들과 경희궁에서 서초동까지 함께하면서 두 분이 몸소 보여주신 깨끗하고 부지런하시며 책임을 지키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김/ 그러니까 선생님 두 분은 30대에 모교에 부임하신 거군요?
손/ 그때는 정말 혈기가 왕성했어요. 제가 와서 처음 가르친 학생들이 29회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남다른 정이 가지요.
연/ 제가 온 것은 손 선생보다 한해 빠른 ’74년으로 기억해요. 교육계에 몸담은 지 10년 차였을 겁니다. 서울 사대부여중에 있었는데 막상 모교에 간다니 설레고 부담도 가고 그랬지요.
김/ 저희 때 학생들은 두 분 선생님을 다 어려워했습니다. 선생님이기 이전에 선배님이었으니까요.
연/ 모교에 오니까 말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더라고요. 
손/ 나야 뭐 원래 무차별 후려 패니까... 근데요, 난 수업 때는 그러지 않았어요. 교실 밖, 그러니까 학생들의 생활면에서 그런 거지.
김/ 선생님들의 학창 시절도 궁금합니다. 서울고 재학 시절에는 오히려 연대성 선생님이 더 유명한 학생이었다 들었습니다.
손/ 그건 맞아요. 저 친구는 규율부였고 나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지. 나는 공부만 했던 얌전한(?) 학생이었어요.
연/ 규율부를 하긴 했지만 유명한 학생은 아니었고, 나는 사실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어요. 집도 당시 서울 외곽 시골스러운 뚝섬이었고 밭일에 나무도 하고 돼지도 키워보고, 그래서 원래 취업이 빠른 상업학교를 가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서울중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고 떨어질 줄 알고 지원했는데 붙었습니다. 근데 정말 입학하고 보니 당시 서울 시내 명문 초등학교 출신들이 다 모였더라고.
김/ 4대문 밖 초 중교를 나온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군요.
연/ 글쎄... 그런데 그냥 모든 게 고마운 겁니다. 열심히 다녔지요. 뚝섬에서 그 당시 전기 사정으로 자주 멈추기도 하는 전차 통학으로 중, 고등학교 6년 개근을 했어요. 감사하지. 서울대도 가고 모교에서 선생도 하고 교장으로 은퇴까지 했으니.
손/ 저는 서울 남산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전쟁이 난 거지. 그래서 청주로 피난을 갔어요.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보는데 경기중학 하고 서울중학 성적이 다 되는 거야. 집안에서는 경기중학을 가라는데 나는 서울중학을 고집했지. 이유가 서울중학을 가야 서울대를 가겠더라고. 학교 이름이.(일동 웃음) 입학하니 뭐 다들 공부를 잘해요. 매달 월말고사를 보는데 여기서 평균 이하면 과락이 되는 거야. 이게 반복이 되면 결국 학년 유급을 하는데 긴장의 연속이에요. 오죽하면 고등학교 올라갈 때 5~60명은 떨어져요. 그리고 다른 학교 학생들로 채워졌지. 다들 천재들인데, 그러니 내가 공부만 했을 수밖에 없지요.
김/ 손경수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깡패로 불리셨습니다. 그 별명은 당시 학창 시절을 보낸 저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서 지금도 존함보다는 별칭으로 기억하는 동문들이 많습니다.
손/ 사실 모교에 부임하기 전 경동고에 있을 때부터 내 별명이 깡패였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아이들이 당연히 모르겠거니 했지. 아. 그런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땐데 어떤 녀석이 저만치서 “야. 깡패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불렀지. “너 내가 깡패인 거 어떻게 알아?” 그랬더니 글쎄 “우리 형이 경동 나왔어요.” 그러는 거야. 내 참.
이 대목에서 필자의 졸업 30주년 행사 날이 떠올랐다. 당시에 고3 담임선생님들을 모두 초대했는데 사회를 봤던 나는 선생님을 소개하면서 별명을 함께 불러 드렸다. 선생님은 인사하시면서 “저 김정일이는 30년이 지났는데도 깡패~깡패~ 한다” 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때 우리는 아침에 검은색 선글라스에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고 올백 머리에 양손을 허리에 올린 선생님이 지키고 계신 교문을 무사통과하는 것이 큰 숙제이자 고민이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선생님의 턱짓 한방이면 바로 이발소로 직행.
연/ 사실 손 선생이 노력을 많이 했어요.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컸고요.
손/ 연 선생은 교회 장로시라 애들을 때리거나 그러지 못하셨지.
연/ 그때는 장로가 아니었고, 다만 나는 과목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가르치려 노력은 했지요.
김/ 그런데 저희는 연대성 선생님도 어려웠습니다. 손 선생님이 마치 집안의 까다로운 둘째 형 스타일이라면 연 선생님은 듬직한 맏형 같으셨어요. 선배들의 모교 이전 반대 데모 때 얽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손/ 70년대 말쯤이었어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야단 났다 이거야. 학생들이 서초동 이전 반대 구호를 외치면서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한다고... 그래서 무작정 교문으로 나갔지요. 학생들 앞에 버티고 서서 “니들 나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 (이 대사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보다 10여 년이 앞선다.) 그랬더니 좀 가라앉는 것 같더라고. 나는 그때 나 혼자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저쪽 담을 보니 어느새 연대성 선생이 나와서 담을 넘는 아이들을 끌어내리고 있더라고. 우리 둘만... (일동 웃음)
연/ 어쨌든 지금은 담담히 말할 수 있는데, 그래서 큰 사고 나지 않고 잘 해결이 됐어요.
김/  두 분은 재직 시절 모교와 후배들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연/ 나는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지금의 경희예술제를 위해서 노력은 했습니다. 예산 문제 때문에 교장 선생님이 내 앞에 결재서류를 내 팽개치는 일도 있었고. 하지만 어떻게든 그걸 관철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제 기획 총괄 같은 역할인데 교장 선생께 미움을 받아 가며 일을 했습니다.
손/ 사실 연 선생 말고는 교장이나 다른 선생들이 디스를 많이 했어요. 제가 야구는 참 신경 많이 썼어요. 기금 모금이나 선수 스카우트, 감독 선임 등등 실무를 담당했지요. 또 많은 동문들이 도움을 줬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6회 장익용 선배, 7회 조창환 선배, 15회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 그리고 12회 동기인 야구 중계하던 KBS 김재영 아나운서, 그 친구는 심지어 중계하다가 방송에 대놓고 “우리 서울고등” 하고 외쳤었지요.
김/ 모교 재직 시절 다른 기억나는 추억담을 듣고 싶습니다.
손/ 당시에 동문 선배의 자제들이 여럿 재학 중이었어요. 저는 복장이나 머리 상태에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규정에 어긋나면 누구라도 가차 없었지요. 심지어 어떤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라고 은근히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
김/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손/ 더 터졌지. (웃음)
연/ 그런 경우는 나도 있었어요. 아마 손 선생과 비슷한 경우였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제자들이 어디에 내놓아도 참 깨끗했어요.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내가 담임한 반에서 대학 예비고사 전국 수석이 나온 겁니다. 박석원(30회) 군인데 가능성이 보여 꾸준히 관리를 좀 했는데 잘 해 주었어요. 평준화 이후의 경사였습니다. 손 선생 네 반에도 전국 석차가 좋은 친구가 있었는데 은근히 경쟁이 되더라고. (웃음)
손/ 그래요. 우리 모두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심지어 교장께 “손 선생이 교장 혀~!” 소리도 들었을 정도로...
김/ 김원규 교장선생님의 일화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저희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생님들이 보신 김원규 교장은 어떤 분입니까?
손/ 우리가 중학생일 때지 아마... 사람마다 장단점이 다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은 우리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참 잘했어요. 복지와 장학에 대한 생각이 탁월하셨어요. 선생님들의 의식주 같은 기본 생활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신 거 같아요. 그래야 잘 가르치니까.
연/ 어렸을 때 인격형성이 평생을 간다는데 그분의 가르침 중에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없어야 좋을 사람이 그것인데 너희는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이게 얼마나 강하냐면 그 가르침을 우리들이 평생 지켜 왔어요.
김/ 선생님들은 의무 연한을 훨씬 넘기시어 8년이나 모교에 재직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두 분이 동기로서 인연을 좀 이어가셨나요?
연/ 저는 한동안 건강이 나빠져서 좀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완쾌되어서 잘 지냅니다.
손/ 이 친구 위 수술을 했어요. 맡았던 반 애들이 내게 연락을 해서 우리 선생님 어느 정도십니까 물어봐요. 그래서 내가 “야! 니들 선생님 살았을 때 얼른 찾아봐. 낼모레 한다” 그랬지.
연/ 제자들에게 죽는다 그랬어? (웃음)
손/ 살아줘서 고맙지. 내가 요즘 동기들한테 중국어를 가르치는데 연 선생이 나한테 그걸 배워요. 야~ 훌륭한 학생이야. 숙제도 잘하고 외우는 것도 기가 막혀. 역시 서울고 출신은 나이 들어도 달라요.
연/ 선생이 훌륭해서 그렇지. 덕분에 지난번 대만 가서도 잘 써먹고. 인연이 또 있지?
손/ 나는 모교에 너무 오래 있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8년 있다 떠나고 유학해서 공부를 더 했는데 나중에 중앙교육연수원 교수로 있을 때 연 선생이 연구원으로 왔었고 교원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는 연대성 선생이 또 교장 연수 받으러 왔었지.
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셨네요.
연/ 그때 연수 점수를 손 선생이 매겼는데 점수를 아주 잘 줬어.
손/ 우리 재미있게 살아.
김/ 선생님들의 지나 온 삶에서 모교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오늘 자리를 정리하면서 지금 재학 중인 모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손자 정도 되지요?
손/ 그렇지 손자뻘이에요. 김정일 아나운서 때는 시절이 시절이라 모든 게 공부였잖아. 그런데 내가 공부하려고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걸 해야겠더라고. 왜 그렇잖아. 어미 아비는 지 자식한테 공부 공부 하지만, 할아버지는 야 놔둬라 저 하고픈 거 하게... 그러잖아. 지금 우리 동기들 모여 공부하는 것도 재밌게 하니 얼마나 좋아.
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로군. 맞아요. 서울고는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줍니다. 내 평생 마음속에 든든한 배경이기도 했고요. 지금 재학생들도 그걸 알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잘해야 하고, 할 수 있다 생각해야 합니다.
손/ 그나저나 김정일 군 하고 약속을 했는데, 34회 졸업 50주년에 꼭 참석하겠다고. 14년 남았나?
연/ 90대네. 우리 가능하겠지?   
당시에 여러 동문 교사들이 함께 하셨지만 나는 그때 그분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가 그 시절 체험한 많은 것들이 실은 그분들의 그늘 아래서였고 그분들의 고민과 열정의 결과물이었으며 우리 생을 덮어 주는 조각보가 되었다.
이 날 손경수, 연대성 두 분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깜빡 잊고 못 드린 말씀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희궁에서 1년 반, 서초동에서 1년 반 선생님들과 함께 한 시간이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별유천지 무릉도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정일(34, 편집위원) 사진제공_ 서정욱(37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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