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원로에게 듣는다-김계수(6회) 재독의사/Gluckauf

“자신이 좋아해 선택한 길은 주저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

이번 겨울호 서울인이 만난 동문은 김계수(6) 동문이다. 성균관대 약학과 재학중이던 1967년 독일로 건너가 의학을 전공하였고, 1982년 병원을 개원한 후, 26년간 독일에서 의술을 펼쳤다. 재독 서울고 동창회에 이어 유럽동창회를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고 총동창회는 2004년 김 동문에게 자랑스런 서울인상을 수여한다.

20181011, 서초동 교정에서 인왕예술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날 모교 역사관에서 김 동문을 만났다. 인터뷰 전 선배는 서초동 교정의 이곳저곳을 둘러봤고 옛 경희궁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대학입시 실패로 방황하던 시기, 독일로의 유학을 결심하다

김계수 동문은 서울대 약학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본인보다 성적이 좋지 않던 친구들도 합격을 했던 터라 자괴감이 들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성균관대 약학대학 정성분석 전공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김 동문은 대학시절 독일의 유명한 정성분석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자 했다. 늦은 나이에 의학공부를 시작해 남은 여생을 아프리카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처럼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온통 김 동문의 머리 속을 지배했다. 독일 유학을 고민하던 시기에, 공연차 인천에 독일 서커스단이 온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식당에서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서커스 단원들이 식사를 마친 후 남은 음식을 모두 싸가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문화적 충격으로 독일행을 결심하게 된다.

 

의술을 통해 남을 돕는 삶을 살고자 의학의 길을 걷다

196727세의 청년 김계수는 독일 기센대학교 유스투스 리비히 생화학 연구실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에 온 목적이 연구실에서 실험이나 하자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원래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슈바이처와 같이 의술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또 당시 한국에는 없던 법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구소장에게 계획과 포부를 말하고 의과로 전과를 하여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대학과정을 부분적으로 인정은 받았지만, 언어가 낯선 타국에서의 학업은 귀머거리, 벙어리가 공부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뒷자리에 앉으면 졸까 봐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집에서는 마치 밤이 없는 것처럼 시커먼 천을 사다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은 다 가렸다. 독일 친구들은 10~11시에 공부를 끝내고 맥주를 마시러 가는데, 언어 때문에 김 동문에게는 독일 친구들처럼 여가시간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늦은 밤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차역에 가서 낮선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독일인들은 무엇을 물어보거나 배우려고 하면, 친절하면서도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상처난 명문 서울고 출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치던 해부학 시험에서 명칭과 기능을 물어보는데 명칭은 알았지만, 뼈의 기능과 작용을 설명하지 못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내주셨는데 이 못난 놈은 시험에 떨어졌구나하는 죄송함과, ‘명문 서울고 출신으로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눈이 펑펑내리던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일주일 뒤에 치러진 재시험에서 보란 듯이 통과하게 된다. 늘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학업에 정진하여, 1974년 당당히 의사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이후 전문의(내과) 자격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82년 병원을 개업하게 된다.

학업을 마치고 나서, 어느 교수가 중증 심장질환이나, 골절 등 외상환자, 수술 후 치료를 요하는 환자들이 재활할 수 있는 2000 병상 규모의 병원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를 권해서 함께 하게 됐다.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다가 그는 위궤양에 걸리고 만다. ‘이러다간 안되겠다하는 생각에 독일유학을 결행한 지 20년 만에 한국을 찾게 된다. 한국에 정착해 보려고, 서울대 병원을 비롯, 이 곳 저 곳 알아 봤다. 김 동문이 20년 만에 찾은 한국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몹시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이런 사회혼란은 김동문의 발길을 다시 독일로 향하게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유학을 위해 독일로 향한 이후, 반세기 동안 독일을 무대로 활동하게 된다.

 

재독 한국 교민사회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다

공부를 했던 기센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터전을 옮겼다. 한국인을 만나기 힘들었던 기센과는 달리, 뒤셀도르프에는 파독 광부들과 파독 간호사 등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자연히 교민 관련 모임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임에 참가하며, 교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가능한 범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학 초기부터 병원을 개원할 때까지, 또 그 후에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아는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그때 느꼈다. 한국문화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한독문화협회를 만들고 한국문화 알리기에 앞장섰다. 한국 교민들 뿐만 아니라 독일인들에게까지 한국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한국의 민요와 가요를 가르치고, 독일 사회에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심어주려 한 그의 노력이 각종 발표회나 방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교민사회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재독 서울고 동창회와 유럽 동창회의 맏형

1971년 김 동문의 집에 서울고 동문 7명이 모였다. 동문들의 배우자까지 포함하여 14명이 모였는데 거기에 모인 동문들이 의기투합하여 재독 서울고 동창회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고, 그 후로 매년 모임을 가졌다. 매년 참여 동문들이 늘었고, 가장 많이 모였을 때는 배우자들을 포함하여 120명이 모이기도 했다. 소문을 듣고 영국과 프랑스에 거주하던 동문들도 한 두명자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재유럽 총동창회를 결성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 탄생한 것이 독일, 영국, 프랑스를 묶는 재유럽 서울고 동창회이다. 본국의 총동창회로부터 동창회기도 전달받았다. 모임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문들이 모여 12일 또는 23일의 모임으로 진행되었다. 동문들 중에는 교민도 있었지만 유학생이나 주재원인 동문들도 있어, 재독 동창회나 재유럽 동창회가 객지에서 생활하던 동문들에게는 커다란 의지가 됐다. 아직도 유럽에 거주했던 동문들은 한국에서도 서유회(서울고 유럽지역 동문모임)를 갖고 있다.

 

재유럽 동창회의 대부로써 동문들에게 늘 일관성을 강조하다

김 동문은 동문들에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늘 미래를 보고 나가라라는 말을 강조했다. “본인이 좋아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실패를 했다고 해서 주저앉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 목표를 정했으면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 그러면 성공이 보인다.”, “우리 후배들은 자신의 명예우리들의 모교 서울고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서울고등학교는 (     )이다

나의 모교 서울고등학교는 내가 여태껏 살아옴에 있어 나를 지탱해 준 자부심이다. 또 스승의 가르침대로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늘 솔선수범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 왔다. 서울고는 내 삶을 지배해 온 근본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행·사진_서정욱(37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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