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마종기(9회, 시인·재미의사)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아주 오래전 길을 떠난 시인은 돌아와 있었다. 아직 타향에 거주하면서 자주 들르기만 하는 고국이지만 이제 시인에게는 독자가 노 시인의 시에서 만났던, 시인이 표현했던 그 나라가 아닌 듯했다. 나만의 생각일까. 서울에 머무는 동안 거처하는 남산 북쪽 끝자락 숙소 로비에서 만난 시인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서울의 공기, 바람, , 사람의 좋은 기운을 혼자 고스란히 덧입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읽었다. 시인의 시집도 여러 권 갖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웃에 함께 했던, 마치 손만 뻗으면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이었다.

그렇다. 시인의 생각, , 마음이 내 서가 한편에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마종기 선배님에게 드리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이제 나는 그분의 시어가 아닌 육성을 들을 차례였다.

 

詩作, 始作

나의 문학의 흐름은 생명, 그리고 삶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문학가이신 아버지(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와 무용가셨던 어머니(현대무용가 박외선 선생) 덕분에 어릴 적부터 일찍이 음악회를 접하는 등 예술적 소양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서울중·고 재학 시절에는 황순원 선생님의 아들 황동규 시인과 친했지요. 그는 나의 친구이자 문학 동지입니다. 서로 충고하는 그런 사이이기도 하고요. 서울고 시절 문예반장, 신문반 활동을 했습니다. 문학에 경도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산을 대했을 때 표면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지만 그걸 보는 내 안에는 경외심이 자리하지요.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

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

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

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

어느 시인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감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

그러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 시인의 용도 .

 

시는 어릴 적부터 썼습니다. 그때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가 있었는데 그 잡지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이 생겼고 1953년 학원문학상 1회 수상자가 저였어요. 아마 중3, 1, 2 이렇게 받았죠. 당시 전쟁 통에 볼거리, 즐길거리가 없던 학생들에게 이 잡지가 꽤 인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고교시절 원래 나는 문과 반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권유로 연세대 의대에 간 것입니다. 의대 시절 본업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문과대 청강을 하다가 교수이신 시인 박두진 선생을 알게 되고 예과 때 현대문학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했어요. 그때 서울대 의대 대학원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는데 마침 한일회담 반대가 한창이었을 시절입니다. 선배 문인들이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는데 거기 내 이름을 넣었어요. 현역 군인 신분이라 바로 기관에 연행되었지요. 그때 감방에서 자살할까 봐 허리띠, 구두끈 다 풀고 한 열흘간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 결국 아버지와 친구들이 구명운동을 해서 나오게 되었고 수련의 과정을 밟기로 한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선고유예를 내렸습니다. 1966년에 저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 바람의 말 .

 

나에게 시()?

내게 의사 직업은 생활의 방편이었어요. 그러나 나를 의사이도록 해 준 것은 바로 시와 문학이었어요. 한때는 그러니까 의대 입학 후, 나는 시인이 아니다. 의과대 학생일 뿐이다. 문학은 나에게 위로이며 방어기제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시는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어요. 의사들, 특히 한국인으로 미국에 건너간 의사들의 삶은 치열했습니다. 많은 우수한 친구들이 폐인이 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요. 미국 생활이 어려웠던 겁니다.

사실 나는 미국에 오래 살려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떠났지만 중간중간 귀국도 했고, 군사정부가 끝나고는 좀 더 들어오기가 편했고요. 실제로 돌아오려고 수년 전에 한국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군요. 거기서 나고 자란 2세들 생각도 해야하고, 어쨌든 미국에 오래 사는 게 아닌데 참을성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병원에서 주는 밥 먹고...

 

모국어

늘 한국 책을 가까이합니다. 시도 많이 읽습니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친구 만나 술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방에 가서 책 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정신 속에 집어넣으려 노력을 많이 했어요. 의사와 문인은 내게 동전의 양면입니다. 의사이기에 모국어를 잊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 치열한 삶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 꽃의 이유 .

 

가장 마음에 드는 시요? 다른 사람들은 우화의 강이라고 하던데 저는 그냥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좋아요. 이건 오히려 의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은 감정적인 거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니에요. 사실입니다. 리얼리티예요. 의사 노릇 하면서 사람,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보아 왔습니다. 죽음이 아름답다. 죽음 찬양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때는 정의라는 것도 많이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이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실은 그 이름 아래 무자비한 일을 하기도 하거든요. 저의 종교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은 절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의사를 하면서 현장에서 지켜본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분명 사실로 존재합니다. 과학이냐 비과학이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 우화의 강 .

 

63년 의대를 졸업하고 2002년 미국에서 은퇴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의사 노릇을 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은퇴하고 연세대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했고 2010년에는 문학의학협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미국 의과대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과 인문학 강의를 해왔습니다. 의대생에게 문학과 예술,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건, 의료 시술을 하는 과학자로서의 의사에서 벗어나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전인격적 의사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일이 아니더라도 한국에 자주 올 겁니다. 건강이 아직은 좋으니 시집도 내고, 아직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묻히고 싶습니다.

 

- 대화 -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팔십이 넘은 노 시인은 과거를 보지 않고 앞을 보며 살고 싶다 했다. 그의 시가 맑고 투명한 이유를 알겠다. 시인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맑은 눈과 투명한 영혼을 재료 삼아 아름답고 주옥같은 시어들을 오래도록 쏟아 냈으면 한다. 시인의 가슴을 투과하여 손으로 이어져 활자로 태어나는 살아 있는 글들을 더 많이 만났으면 하는 바람은 나의 욕심일까? 아니다. 그저 고교 동문이기 전에 시인인 그의 열렬한 팬으로서의 작은 소망이다.

                                                                                                                                             진행·글_김정일(34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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