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모(11회, 한양대 명예교수) 동문과 그 제자 안신원(36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동문의 만남

 

 손경수 VS 연대성 선배와 스승 사이에서

김병모(11회, 한양대 명예교수) 동문과

그 제자

안신원(36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동문의 만남

 

이번에 만나는 동문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내가 만나는 두 분 동문이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승과 제자, 같은 대학 같은 과의 교수, 동종 학계의 선학과 후학, 그 이전에 고등학교 선후배, 더 이전에 선배의 아들과 아버지의 후배, 이쯤 되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창회보에서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 주인공은 대한민국 1세대 고고학자이자 고고학 대중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고려문화재단 이사장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11회)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한국대학박물관협회 회장인 안신원 동문(36회)이 그들이다. 영화나 소설, 혹은 매체를 통해 고고학을 건너편에서 넘겨다본 이들은 대개 누구나가 이 분야에 대한 신비감과 함께 나름의 환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 우리가 적잖이 보아 온 모험과 탐험이 얼기설기 틀어 얽힌 스토리가 줄기를 이루는 외국 영화의 영향이 크리라. 인터뷰 들머리에서 김병모 박사는 그 영화들 속 주인공에 대해 단칼에 정의를 내렸다. “그건 고고학자가 아니라 도둑놈들이지.” 안신원 교수는 “고고학은 사자성어로 ‘주경야독’, 혹은 ‘노가다’ 로 정의할 수 있다 했다.”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불 밝혀 책을 읽는, 그야말로 죽어라 땅을 파며 공부하는 분야라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한편으로 그렇기에 같은 분야에서 동문 선후배가 함께 일가를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묻고 답하고 소개하는 것이 부질없다 생각해 본 것이 얼마만인가?
안신원 교수는 부친도 서울고 출신이다. 전 한양대학교 의료원장 안경성 교수(7회)가 그 분이다.

김: 인터뷰 질문지가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고, 의대는 동문이 같은 과 전공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인문학 분야는 드물어요. 처음에 의대에 계신 동문 선배 안경성 교수가 자기 아들 고2 짜리 안신원이를 데려왔어. 나한테. 아예 이걸 전공시키겠다 이거였지. 그 다음은 이 사람한테 물어봐.
안: 그건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사학과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 아버님은 학교를 중요시한 게 아니라 그 과에 누가 있느냐, 그러니까 교수를 중요시하셨어요. 그때까지 저는 고고학을 몰랐어요. 근데 선생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데 고 3 때 시험 끝나고 선배들과의 대화 시간이 강당에서 있었는데 그때 김병모 교수님이 오셨어요. 그때 처음 뵌 거지요. 저런 분야가 있구나. 재밌다 정도 생각했는데 저희 아버님이 김병모 선생님과 약주를 드시고 나더니 문화인류학과를 가라. 그게 고고학이다. 한양대에 와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아버님 함자가 어찌 되시나 물으시더라고요. 그게 시작입니다.
김: 교장이 요청해서 그때 갔는데 이 친구가 하여튼 그 영향 때문인지 왔어요. 그런데 서울고 출신이라 해서 특혜는 없어요. 동문 선배 아들이라 해서 말이야. 이 과는 3학년 때까지 다 누구나 똑같이 프로젝트로 말하는 거야. 30년 전 얘깁니다. 그리고 이 길은 누가 가라 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대학교 졸업해서도 십 년이 지나가야 보이지요. 쉽게 말해 싹수가 보여야 합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연구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논문지도는 직접 했습니다.
안: 제가 기억하는 교수님은 무서운 선생님이셨습니다.
김: 야~ 내가 무서우냐?(웃음)
안: 선생님 특징은 뭐든지 도통 내색을 안 하시지요. 그리고 어릴 땐 모릅니다. 요즘 같으면 선생님들이 다 미주알고주알 지시하시지만 예전 같으면 학생들이 다 알아서 했지요. 선문답도 있었습니다. 복심을 읽어야 했습니다. 제가 학부 3학년 때 학생회장 하면서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자네는 공부를 하지 말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짐을 쌌습니다.(웃음)
김: 선생 스스로는 누가 무섭다고 생각합니까.
안: 그런데 학생은 안 그렇지요. 직계니까.
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파문시키면 그건 선생이 아니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니깐.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절 안 교수는 장점이 있었어요. 바로 속독이지. 글을 빨리 읽어요. 그건 이해력이 빠르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가르치기가 쉬웠어요. 체질이 강하고 체력도 좋았어요. 공부는 체력이 좋아야 해요. 고고학은 일도 실습도 중요하니까.
안: 사실 교수님이 서울고등학교 선배라 해서 특별한 기대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애초에 그런 생각을 안 했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선배시지만 그런 거 없습니다.
김: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한번 필드에 나가면 한꺼번에 20명 정도 그룹입니다. 그리고 내내 그런 스타일로 일이, 작업이 계속되지요. 그룹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빠지고 탈락됩니다. 거기서 살아 남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뭐 봐줄 게 있나? 발굴은 노동입니다. 앞서 얘기했든 체력이 중요합니다. 요령이 안 통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자기가 살아 남아야 합니다. 안 교수는 그걸 했습니다.
안: 저희 집안은 3대가 의사입니다. 당연히 저도 그 길을 가는 걸로 여길 수 있었겠지만 저는 이 길을 걸었고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힘든 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여름에 어디로 오라. 답사지를 정해 주시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찾아갔지요. 송광사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땀 흘리면서 도착하니 선생님은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계셨어요.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 이건 노동입니다. 요령이 안 통하는 일이지요. 프로젝트입니다.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야 해요. 발굴 보고서도 알파와 오메가 다 써야 해요. 그래도 제자들이 참 많습니다. 안 교수가 어느 날 꾀부리는 거 같아서 군대 가라 했지요. 그래서 갔지. 안 가고 배겨? 난 내 아들한테도 그랬어요.
안: 그때 보따리를 쌌었지요.(웃음)
김: 영화에서 고고학이나 고고학자를 설명하는 것은 어찌 보면 관중의 요구에 부합하게 재탄생 시킨 겁니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현실, 사실에 근접하기 위해 끝없이 퍼즐을 푸는 게임을 하는 겁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각 역사시대 고고학 하는 분들이 겉 그림을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선사시대의 경우 글로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 아예 모르고 갑니다.
그럼에도 발굴은 고고학 한 2~3년 따라다니다 보면 유물이 보입니다. 어떻게 보일까?(웃음) 이게 유적지 근처에 가면 깨진 조각들이 드러나 있는 경우가 있지요. 그게 보입니다.
안: 그건 영업 비밀인데요.(웃음) 그래서 신입생들은 엉뚱한 걸 주워오기도 합니다. 그럼 선배들은 그걸 버리기 바쁘지요. 한 번은 오래된 신발 뒤축을 어디서 파와서 빗살무늬 토기 파편이 아닌가 물어요. 당연히 버렸지요. 학생들에게 여러 단계의 다양한 수업을 시킵니다. 그러면 눈이 떠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끈기와 함께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는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고고학 작업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김: 발굴한 것이 보물이냐... 국보나 건물만 보물이 아니지요. 한 예로 주먹도끼가 한반도에 없다가 전곡리에서 쏟아지는 바람에 세계 학계의 이론이 전부 바뀌기도 했습니다.
안: 금으로 된 유물이나 돌 연장 다 사람이 만든 겁니다. 그 겉모양이 빛나고 당장 돈으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단순히 비싸냐 아니냐의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고고학적 가치라는 것은 그 이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김: 가야사의 경우 김수로왕이나 허 황후에 대한 연구는 내가 김해 김 씨 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들이 갖는 우리의 역사적 가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래서 가야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고고학적 접근으로 연구도 열심히 했어요. 저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안 교수는 베이징대에 유학했지만 주 관심사는 결국 동양 쪽입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고.
안: 제 관심사 전공은 원래 청동기시대인데, 그래서 중국 유학을 한 것입니다. 지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관심사가 넓고 다양해집니다. 요즘 저는 산업유산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분야가 좀 없는데 서구에는 산업 고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당인리 발전소 같은 거지요. 서양에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이 많아요. 근데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고고학이 예전 것들을 발굴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도시재생이라는 것, 그러니까 건축하시는 분들은 건물 자체를 랜드마크로 보지만 우리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사는 것 자체를 그렇게 봅니다. 그게 공장이 됐든 뭐가 됐든 사람 속에, 삶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이게 안 되니까 괴물 같은 건물이 생겨납니다. 유럽은 이게 참 잘 되어 있는데 이제 우리 고고학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줄 믿습니다.
김: 제가 박물관 건축할 때 심사를 많이 가는데 뼈저린 경험이 있어요. 언젠가 모 박물관 설계를 봤는데 아무 개성 없이 그냥 건물이에요. 돈을 아무리 들여도 설계 자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일본 건축물을 베낀 거였어요. 실용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의 문화와 전통이 깃들여 있지 않았어요. 건축물에도 문화의식과 우리 고유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 발전에는 여러 가지가 함께 필요해요. 아파트 짓는 거 보세요. 한숨 나옵니다.
안: 그래서 문화인류학과 분야에는 다양한 공부를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건축, 미술, 종교 등 다양한 공부가 갖춰지면 좋습니다. 하나만 하는 것이 전문가는 아닙니다.
김: 고인돌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노력에 제가 힘을 보탠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요즘에는 고려문화재단 운영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고 이 나이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습니다.
안: 저에게 서울고는 제 인생이 거기서 다 결정 났으니까. 더 좋은 요약 표현이 있겠습니까? 제 부친은 제가 초등학교부터 대학 마칠 때까지 제 학교에 오신 적이 없으세요. 그런데 유일하게 저의 서울고 입학식에 오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왜 오시려느냐고 여쭸더니 글쎄 “야 내 학교 내가 보러 간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러시는 겁니다. 서울고등학교는 제 인생입니다.
김: 나에게 서울고는 감옥이었어요. 공부, 성적의 노예였어요. 그러나 황순원, 조병화 선생님께 배운 것, 큰 영향을 받았죠. 제가 학문의 길로 접어든 것이나 책을 쓰는 것은 모두 이 선생님들 덕입니다. 제 인생의 8할이 서울고로 인해 형성되었습니다. 저는 야구선수 출신이기도 해서 친구들도 주로 야구부 출신을 만나고요, 아직도 모교 야구 응원에 열심이기도 합니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 보따리를 싸야 했던 제자이자 후배는 어느덧 학계의 중견 교수가 되었고 그를 가르쳤던 스승이자 선배는 학계의 원로로 존경받으며 아직도 집필과 강의를 놓지 않고 있다. 새카만 후배에게 서울고 동문이어서 특혜를 주거나 살가운 말 한마디 얹어 주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늘 믿음이 있었고 두 동문 사이에는 늘 사랑과 공경으로 주고받음이 존재했다. 선문답 하듯 던졌던 스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도 제자의 가슴에 시퍼렇게 살아남아 있다. 또 같은 길을 따르는 제자의 선한 눈빛을 스승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학자의 질기고 오랜 인연은 고색창연하게 살아 있는 삶의 유산 그 자체였다.
 진행·글_ 김정일(34회) 편집인 / 사진_ 서정욱(37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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