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오 정 (42회/패션 디자이너)
- 서울고총동창회(0)
- 2019.09.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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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돼라’는
교훈을 따르며 살았다.”서울고 야구부에서 유명 모델리스트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빠올로’
폴앤컴퍼니(Paul&Company) 1호 패션쇼는 서울고에서 열고 싶어2017년 패션업계에 ‘빠올로’가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탈리아로 떠난 지 17년만이었다. 한글 이름은 ‘오정’, 서울고 42회 졸업생이다. 그는 세계 유명 브랜드에서 모델리스트로 일하며 국내 패션업계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프라다 그룹에 속한 ‘미우미우’가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직장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오정은 같은 일을 하는 아내와 함께 ‘스튜디오 폴앤컴퍼니(Studio Paul&Company)’를 열었다. 지인들은 의아해했다.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인정받은 화려한 경력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와 모험을 감행하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좋은 옷을 꿈꾸는 디자이너가 있는 곳엔 언제나 좋은 모델리스트도 있다. 어쩌면 그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오정’과 함께하고 싶은 디자이너가 한국에도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오정은 현재 ‘메이드 인 서울(Made in Seoul)’이란 라벨을 단 자신의 브랜드 ‘폴앤컴퍼니’를 인정받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 중이다.모델리스트를 백그라운드로 가진 디자이너 ‘오정’
스튜디오 한쪽 벽면에는 이탈리아에서 모델리스트로 활동할 당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엔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와 함께 찍은 사진도 눈에 띄었다. 또, 그가 만든 작품들,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들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어떠한 삶을 보냈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그는 자신을 모델리스트를 백그라운드로 가진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디자이너는 알아도 모델리스트는 모를 겁니다. 쉽게 말해 모델리스트는 상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일을 합니다. 디자이너가 만든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구현하지요. 디자이너와 재단사 및 재봉사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합니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모델리스트의 역할입니다.”
사실 오정은 서울고 시절 야구부 선수였다. 그랬던 그가 모델리스트가 된 사연이 궁금했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어렸을 때부터 많았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옷을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지요. 고교시절엔 야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님을 깨닫고는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죠. 당시 아버지께서는 주방기기 제조회사를 30년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IMF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IMF외환위기로 아버지 회사는 문을 닫는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모델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릴 적부터 가졌던 패션에 대한 관심, 제조업에 다니며 알게 된 디자인 작업의 매력 등이 하나로 합쳐진 결과였다.
“마침 아버지 친구분 중, 뉴욕에서 모델리스트를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께 잠시 일을 배웠는데 이탈리아 유학을 강하게 권유하셨죠. 모델리스트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는 감각과 구조적으로 편안한 옷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의 밸런스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탈리아에서라면 보다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우여곡절 끝, 아내와 함께 떠나게 된 ‘이탈리아’로의 유학
그는 이탈리아에 가기 전부터 힘들었다고 전했다. 유학을 결정하고 6개월전에 사전 답사를 갔는데 사기를 당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마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아내는 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 모델리스트 과정에서 처음 만났다. 아내는 결혼 전, 송지오옴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무조건 가자고 했어요. 지금까지도 제 말을 따라준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아내와 함께라면 어떤 험한 곳에도 함께 갈 자신이 있습니다. 천군만마 같은 존재이지요. 이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네요.”
그는 이탈리아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넘도록 과일을 사먹지 못했다고 했다. 적은 월급으로 이탈리아의 높은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 그때 아내도 함께 직장생활을 하며 고생했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힘주어 얘기했다.
또 오정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운’이 많이 따랐다며 인생은 ‘운칠복삼(運七福三)’이라고 했다. 그는 이 사자성어를 서무회(서울고 무역관련 동문모임)에서 만난 장인수 동문(34회)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저만 잘나서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이 아닙니다. 이 직업을 택한 복(福), 그 길을 꿋꿋하게 걸을 수 있던 환경에 대한 복(福), 제 열정을 알아봐줬던 사람들을 만난 복(福)이 있었기 때문이죠. 나머지는 운입니다. 노력은 기본이기에 누구나 합니다.”
그는 2000년에 떠났고, 2017년에 한국에 돌아왔다. 굉장히 긴 허니문이었다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17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보낸 삶에 대해 물었다.‘내 꿈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일하는 것’ 꿈을 이룬 오정
“지금은 모델리스트가 되려고 이탈리아에 오려는 학생들이 많아졌지만, 제가 올 당시만 해도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말도 잘 안 통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내 꿈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온 거다.’라고 했죠. 결국 졸업 후, 꿈을 이뤘습니다(웃음).”
실제 그는 졸업 후, 세계적인 브랜드인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일을 하게 된다. 공식적인 첫 직장은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였다.“갑자기 회사 사정이 나빠졌습니다. 상사가 이직을 권유하더군요. 그때 마침 아르마니에서 연락을 받게 됐습니다. 이직을 권유한 상사는 현재 펜디(Fendi)에서 오퍼레이션 디렉터를 맡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르마니 입사 배경에는 아내의 도움이 컸다. 학교시절부터 아르마니에 가고 싶어한 남편을 위해 아르마니 계열 브랜드의 본사 주소를 모두 외우고 있었던 것. 이탈리아 패션 업체들은 채용 시, 신문에 본사 주소만 적고 공고를 낸다. 근데 아내가 아르마니 블랙 라벨(고급 기성복 라인) 주소를 발견하고 알려준 것이다.
그는 당시 학생 때라 포트폴리오 없이 5장의 사진만 보내고 면접을 봤는데 당시엔 채용이 안됐다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본 모델리스트 디렉터가 ‘언젠가 꼭 다시 보자’고 했고, 결국 지안프랑코 페레와 베르수스에 이어 꿈에 그리던 아르마니에 들어가게 된다.
아르마니에서 6년을 보낸 후, 오정에겐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후 그는 알렉산더 맥퀸, 프라다, 미우미우로 옮기며 몸값을 올렸다.17년 경험 살려 직접 디자인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한국행
“아르마니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이후, 구찌나 프라다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딸이 태어나면서 몸값을 올릴 필요가 있었죠(웃음).”
그는 그렇게 차곡차곡 모델리스트로서의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2017년 한국행을 택한다.
“모델리스트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배워 하산하는 개념이 아니죠. 무엇보다 그동안 배운 경험과 노하우를 국내에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모델리스트를 디자이너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풍토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확신했어요. 젊은 디자이너들의 숫자가 늘고 있었고, 시장이 성장하는 것도 확인했지요. 무엇보다 직접 디자인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죠. 이브생로랑, 발렌시아가 등 알고 보면 전설적인 디자이너들 중, 모델리스트 출신도 많이 있습니다.”이에 더해 ‘동대문’ 이야기를 했다. 옷의 원자재를 하루 안에 구할 수 있고, 빠르게 샘플링이 가능한 동대문이라는 인프라가 한국행에 확신을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한국에 왔고 ‘스튜디오 폴앤컴퍼니’를 론칭했다.
“폴(Paul)은 제 영어이름입니다. 이탈리아어로는 ‘빠올로’죠. 회사를 만들면서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했죠. 결국 원 시즌-원 아이템 브랜드로 성장하자는 목표를 가지게 됐습니다. SS(춘하)시즌에는 원피스가, FW(추동)시즌에는 트렌치코트와 코트가 떠오르는 독보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아내는 원피스와 이브닝드레스(야회복)를, 저는 아우터와 코트를 전문으로 한 모델리스트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의상부터 가방, 구두, 그리고 화장품까지 카테고리를 넓힌 유명 브랜드들도 알고 보면 핵심 아이템 몇 가지로 성공했습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남성 양복, 프라다는 나일론 소재의 가방으로 전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폴앤컴퍼니란 브랜드를 떠올리면 시즌별 핵심 아이템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습니다.”
오정은 귀국 후, 다양한 일을 해오고 있다. 2017년도에 계한희 디자이너와 FW(추동)작업을 진행했으며, 이후로도 다양한 독립 브랜드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 중이다. 또, B2C비즈니스도 시작해 온라인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도 맡았고, 최근에는 서울디자인재단에서 모델리스트에 대한 자문활동도 진행했다.
“귀국 때만해도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희망이 보입니다. 작년 가을 론칭한 트렌치코트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의상들을 내놓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추니 손님들이 알아봐주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여성들이 폴앤컴퍼니를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목표는 ‘메이드 인 서울(Made in Seoul) 라벨을 달고 전세계로 진출하는 ‘폴앤컴퍼니’를 만드는 것입니다.”
힘든 유학생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서울고 시절’ 배운 가치들 덕분
오정은 17년 동안 세계 유명 브랜드에서 모델리스트로 일했다. 종신계약이라는 안정된 자리에 있었음에도 한국행을 선택했다. 끈기와 인내, 그리고 도전정신. 이것이야말로 오정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키워드다. 그는 이러한 가치를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다고 했다
. “서울고 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보다는 운동을 했던 야구부였죠. 하지만, 서울고 야구부에서 인내와 끈기를 배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서울고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서울고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문화도 배웠다고 했다.
“6.25전쟁 당시 서울고 선배님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많이 전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명함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깨닫게 됐습니다.”
기억나는 은사님에 대해 묻자, 서울고 동문이기도 한 손창호 선생님(25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야구부장을 맡고 계셨던 체육선생님이셨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말씀은 ‘운동부라고 특권의식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명찰도 똑바로 달고, 다른 학생들과 항상 똑같이 행동하라고 하셨죠. 스포츠맨은 스포츠맨십을 키워야 된다고 하시면서요. 그때는 많이 혼나서 피하고 싶은 선생님 중 한 분이셨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네요(웃음).”
야구부였던 그는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명문 학교에 다닌다는 자부심은 늘 컸다고 한다. 특히,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선배님들이 학교에 보여주는 애교심이 놀랍다고 전했다.
“많은 선배님들이 서울고에 보여주시는 사랑에 놀랐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다고 학교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모교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또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전세계에 이런 학교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런 분들이 만들어놓은 터에서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많은 선배님들이 후배들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나에게 서울고는 ‘애국’, 서울고에서 ‘제1호 패션쇼’ 열고파
서울고등학교를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요청에 오정은 ‘애국(愛國)’이라고 말했다.
“서울고는 애국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돼라’는 교훈을 따라 살았습니다. 덕분에 이탈리아의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재단사, 그리고 재봉사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모델리스트로 ‘빠올로’를 찾은 것은 아닐까요(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서울고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물었다.
“무엇보다 후배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또, 저와 같은 꿈을 키우는 친구들에게는 좋은 멘토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많은 갈림길 속에 이런 길도 있구나 하고 알려주고도 싶고요. 같은 길을 꿈꾸는 후배들이 있다면 인성과 함께 심미안을 키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연을 다른 각도로 보거나, 미술관, 박물관, 고궁 등을 많이 찾아 다니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울러, 꿈이 있다면 제1호 패션쇼를 서울고에서 열고 싶습니다.”
글·사진_ 김신기(54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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