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한만섭(1회)
- 서울고총동창회(0)
- 2019.12.0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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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50년 만에 발간한 졸업앨범
한국의 공학박사 미국 수출 1호, 시공을 넘는 집념으로 지킨 개교 역사
예나 지금이나 중·고교 졸업식 날 의례 졸업장과 함께 받는 것은 졸업앨범이 아닐까한다.
졸업앨범은 재학시절에 대한 추억을 평생 담아두는 그릇으로서 언제고 퇴색한 기억을 선명한 추억으로 소환할 수가 있다.
이렇게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고 싶은 바램에서 졸업앨범 속 사진은 기록의 형태로 남는 가장 유용한 존재가 된다.
특히 학창시절의 사진을 통해 자신과 친구, 선생님의 모습 아울러 배경이 된 학교 교정 및 시설, 교복, 각종 행사 풍경 등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학교의 성장사를 고스란히 학창시절의 추억과 함께 볼 수 있다.
이토록 졸업앨범은 기념의 속성을 넘어 한 시대의 기록을 저장할 수 있음으로 해서 단순히 추억으로 떠올리기에 졸업앨범 속 사진의 위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귀한 졸업앨범을 졸업일(1949년 6월 15일)에 즈음하여 의례 받을 줄 알았는데, 졸업식 이후 무려 50년이 지나, 고희(古稀)나이 70세에 이른 졸업 50주년의 해(1999년)에 비로소 고교 시절의 졸업앨범을 갖게 된 기수가 바로 제1회 맏형들이다.당시 학창시절이 광복 후 혼란과 질곡의 시대였지만 평생에서 가장 환희가 넘치는 시기였다고 회상하는 1회 선배들의 졸업앨범이 우여곡절 끝에 제1회 졸업생 ‘졸업기념’ 앨범으로 복원되어 세상에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글_ 박영진(35회) 편집위원
아마 졸업앨범 제작 역사상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세계 최장기록을 세우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듯 모교 1회 졸업생들이 마침내 반세기만에 졸업앨범을 갖게 되기까지는 졸업반 당시 앨범위원을 자청했던 한만섭(韓萬燮, 89세) 동기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동문이 6.25전쟁중 다행히 전화(戰禍)를 피한 폐허의 후암동 인쇄소집에서 나뒹굴던 1백여 장의 앨범 필름 원판들을 구사일생으로 건져 소중히 보관한 덕분에 어엿하게 졸업앨범으로 현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오랜 세월 1회 동창 앨범에 대한 미련과 책임을 잊지 않은 덕분에 자칫 유실될 뻔한 자신들과 모교의 역사적 사진 기록물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개교 당시 초대 김원규 교장선생님과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모시고 3년 동안이나 맏형으로서 서울고의 초석을 다지는데 혼신의 열정을 바친 분들이 1회 선배님들이다. 서울고총동창회에서는 1회 동문들을 초청하여 지난 2009년 졸업 60주년 기념 잔치를 열어 들인데 이어 2019년 10월19일 졸업 70주년 기념 구순(九旬)잔치를 모교 양덕관에서 개최한다.
최근 제1회 졸업앨범이 세상에 나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인 한만섭 동문이 자신이 편집한 2차 편집본(일명 한만섭편집본)을 서울고역사관에 기증하고, 겸하여 총동창골프대회에 참가 차 일주일 체류일정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부인(이성덕 여사)과 함께 잠시 귀국하였다.
모처럼 화창한 초가을 하늘아래 까마득한 동문 후배들과 즐겁게 골프대회를 마친 다음날인 9월 24일 오후 한만섭 동문 숙소인 서래마을 앞 한 호텔에서 편집위원과 마주했다.
구순(九旬)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후배를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꼿꼿한 자세와 정갈한 말씨는 연세가 무색하게 정정함이 물씬 묻어나왔다. 전날 후배 동문들과 처음으로 즐긴 골프대회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이라 그런지 아주 행복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나는 졸업반 앨범위원으로 참여하여 1948년 9월부터 1949년 7월 사이에 사진 촬영한 약 400여 장의 필름을 앨범제작을 의뢰한 사진관에 가져가 인쇄본 편집까지 마쳤으나, 막상 인쇄에 들어가려니 사진관의 재정난으로 인쇄를 못하게 되었어요. 졸업 후 10개월이 지난 때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렵게 다시 앨범 원본과 사진 원판을 돌려받아 새로 섭외한 인쇄소로 가져가 인쇄을 맡겨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때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이었어요.
앨범은 결국 인쇄를 못하게 되었지요. 서울은 그 사이에 무인지경이 되었고, 51년 3월 경 국군1사단이 서울을 탈환할 때, 후암동 인쇄소집을 어렵게 찾아가 빈집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필름 원판 약 100여 장을 수거하여 내내 보관한 것이 졸업앨범 발간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후일 내가 서울공대 교수로 재직당시(1957년~1966년) 보관 중이던 필름원판을 서울공대 암실에서 프린트(인화)하여 1963년경 만든 것이 제2차 편집본입니다. 1966년 내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그 2차 편집본 즉 한만섭편집본을 동기생에게 인계하고 떠났는데, 안타깝게도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던 중 뜻밖에 2003년 12월 동기인 노원부 동문이 이를 발견하였다는 편지와 함께 편집본을 제가 있는 미국으로 보내오게 된 것입니다.
2차 앨범편집본의 특징은 개인 사진은 모두 빠져있었으나, 집무실의 김원규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전 교직원 단체사진, 은사님들의 사인카드, 각종 과외 활동반 사진, 졸업생 환송식,전교 교내운동회 사진 등 학교 학내활동의 역사적인 기록물들이 대부분 이었다.
이 특별한 사진들은 얼마 전까지 동창회보의 ‘그때 그 시절’ 코너에 빛바랜 흑백사진 형태로 초창기 학교 역사의 이해를 도와 왔다.
그 사이 1998년 한국에서는 조용환 당시 1회 동기총무가 행방불명되었던 이 2차 편집본 사진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동기들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을 보완하여 제1회 졸업앨범을 정식으로 발간(1998년 6월 1일 발간, 1999년 졸업 50주년 때 배포)하게 되었고, 나는 노원부 동기에게서 돌려받은 제2차 편집본과 2008년 이를 다시 스캔하여 고해상도 CD앨범으로 제작한 것을 이번에 모교 역사관에 기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졸업 후 50년 만에 졸업앨범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사연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만섭 동문이 직접 서울고 50주년 기념문집, 1996년 發刊 두 번째 권인 ‘남은 이야기, 숨은 이야기’에 ‘못 다 이룬 1회 졸업앨범’ 제목으로 잘 정리해 놓았다.
한만섭 동문은 수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외치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 공학박사의 미국 수출 1호"라는 명예와 자부심으로 한국의 항공 공학분야의 발전을 개척해 온 1세대 공학도다.
1954년 3월 서울대 공과대학 조선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다음해인 1955년 9월, 그의 나이 25세 때 서울대와 미네소타대간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1차 교환교수진에 포함되어 미국에 파견되고, 1956년 당시 샌디에이고에 있는 Convair항공사에서 한국인 최초로 제트여객기 제작공장을 견학하게 된다.
27세 때인 1957년 미네소타 대학원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항공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그해 귀국하여, 1967년까지 서울대 공과대학 조교수로 봉직하며, 초음속 풍동설치 등 한국 항공 공학 교육 및 연구시설 기준을 설립하고, 국방과학연구소 촉탁으로 로켓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연구와 교육 활동에 진력한다. 1959년 일반대중들의 우주과학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여 ‘대한우주항행협회’를 발족하는데 기여하고, 1966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초음속 풍동을 이용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 동문은 1966년부터 1993년까지 27년 동안 미국 NASA와 보잉항공사에서 근무하며 보잉 747, 767, 777 항공기의 설계와 공동실험 업무에 엔지니어로 종사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두 회사에 근무하는 27년간의 미국 생활 중에도 졸업앨범 필름을 잘 보관하여 1993년 모국의 항공산업 육성을 위해 귀국하며 모두 가져왔다고 한다. 이때 가져온 약 60여 장의 사진이 졸업기념 앨범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1998년 삼성항공 항공우주연구소 소장과 한국 중형항공기 개발센터장을 끝으로 국내 업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한 동문은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부인 이성덕 여사(87세)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 인근 골프장에서 일주일에 세 번, 매주 월, 수, 금요일 10년, 15년 후배들과 어울려 골프를 친다는 한 동문은 이번 총동창골프대회 참가가 더없이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뿌듯해 하면서도, 올해 참가를 계기로 총동창회에서 “내년부터 단골 초청자로 매번 부를까봐 걱정된다”며 싫지 않은 웃음을 지으셨다.
함흥고보 3학년 때 해방되어 월남, 당시 6년제 서울공립중학교 현, 서울고 1회로 입학한 한만섭 동문은 같은 기독교 집안의 따님으로 함흥에서부터 ‘기독면려회’ 모임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이성덕 여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나 사귀어오다 휴전 2년 후인 1955년 교환교수로 미국으로 가기 전 결혼하여 지금까지 동무처럼 해로하고 있다. 슬하에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의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아들과 두 따님을 두고 계시다.
한만섭 동문은 미국에서 서울고 모임은 물론 함흥출신의 기독면려회 모임을 이끌며, 회보를 직접 제작하는 등 공학도답게 핸드폰과 컴퓨터 그리고 포토샵 등을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계시다. 이렇게 젊게 사시는 비결이 일상에 있으시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해 그런지 욕심이 없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 아닐까요”라고 되물으시며, ‘물질보다 정신의 행복함’을 강조하시는 한 동문은 김원규 초대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안현필 선생님등 초창기 모교 재학시절의 열정이 넘쳤던 스승님들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신다.
아울러 “지금 모교 후배들은 너무 잘하고 있으며, 원만한 사고를 갖고 매사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 받았으면” 하는 희망도 전하셨다.
올해 졸업 70주년, 곧 구순(九旬)을 맞는 대선배인 1회 선배님과의 인터뷰는 어느 동문 만남보다 각별하고 애틋하다.
송천필담(松泉筆譚)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황흠(黃欽)이 80세에 물러나 고향에서 지낼 때 종을 시켜 밤나무를 심게 했다.
이웃 사람이 웃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황흠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런 걸세. 자손에게 남겨준대도 나쁠 건 없지 않는가?”
10년 뒤에도 황흠은 건강했고, 그 때 심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렸다. 이웃을 불러 말했다.
“자네 이 밤 맛 좀 보게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날 위한 것이 되어 버렸군.”
한만섭 선배님을 비롯하여 1회 선배님들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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